우연(Contingency, Coincidence)과 필연(Logical Necessity)
<송선생 교육칼럼 88>
우연(偶然)히 어떤 일을 하게 되던지,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이민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캐나다에 살게 된 우리 이민자들이나,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을 사랑하게 된 연인들….
하지만, 같은 이야기에서 ‘우연’이란 단어를 ‘필연(必然)’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캐나다에 살게 된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자연스럽게 숙명(宿命)적 결과로 느껴진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일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우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King Minons 는 신 포세이돈에게서 아름다운 황소를 선물로 받았다. 왕(King Minos)은 신에게 바쳐야 하는 그 멋진 황소를 아껴서, 다른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또한, 그의 아내(Queen Pasiphae)도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제사를 소홀히 하자, 화가 난 두 신들은 왕과 왕비에게 벌을 내리게 된다. 왕이 아끼는 그 아름다운 황소를 왕비가 사랑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왕비는 그 황소의 아이를 낳게 되었다. 머리는 뿔이 달린 황소이고 몸은 인간인 왕비의 자식, Minotauros는 ‘미궁’에 갇혀서, (미궁에) 던져진 인간 제물을 먹고 살았으며, 왕 미노스는 9년마다 아테네를 침공해서 어린 남녀 일곱 쌍을 잡아서 황소인간에게 먹이로 주었다.’
고대인들이 생각한 우연은 신화에서 보는 것과 같다. 왕비는 황소를 사랑하여 괴물 자식을 낳고, 왕은 자기가 아끼는 황소를 아내가 사랑할 줄을 꿈에서라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다 본인들이 저지른 불경에 대한 신들의 저주였다. 어쩌면, 신들은 아름다운 황소를 왕에게 주면서, 이런 일들이 일어 날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에게 받은 왕좌와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우연히 찾아온 불행은 피할 수 없는 운명… ‘필연’이었던 것이었다.
신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하고 정교한 암시를 하고 있다. 신화에서 언급한 ‘9년’은 태양신(해)과 태음신(달)이 만나는 해(year)로, 결혼의 성스럽고 화려함과 함께 태생적인 불행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미궁’에 갇힌 괴물이나 미궁에 던져진 ‘인간먹이’도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희생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미로’는 길을 잃게 만들어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어렵게 만든 여러 갈래 길의 조합이지만, ‘미궁(迷宮)’은 목표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갈림길이 없이 한 길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로와 미궁은 둘 다 유사한 공간의 반복으로 최종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심리적인 압박을 받지만, 미로는 길을 잃게 되기도 하는 반면, ‘미궁’은 소라 껍질의 내부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결국 목표점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궁은 ‘필연’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연’의 철학적/논리적 의미
BC 4세기부터 철학과 논리학의 오래된 난제로, ‘미래시점 우연명제의 문제(the problem of future contingents, 未來時點 偶然命題의 問題)’가 있다. 일종의 paradox인데, 결론을 말하자면, ‘우연’히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래는 논리적으로 ‘필연’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이 부분은 읽지 않고 넘어가도 좋지만), 명제는 참 또는 거짓을 가져야 하는데, 미래시제를 가지는 명제는 그것을 참(또는 거짓)이라고 하면, 그 명제가 참이기 위해선 미래가 결정되어 버려야 하는 ‘필연’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2015년 1월 1일 정오에 빅토리아에 있을 것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할 때, 나는 그 때 그 장소에 있어야 하는 숙명에 놓이게 된다. 반대로 그 명제가 거짓이라고 하면, 나는 그 때 그 장소에 없어야만 하는 것이 숙명이다. 따라서, ‘미래시점 명제는 그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현재 우리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것의 진위는 이미 ‘숙명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라는 것이 고대 현인(賢人)들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라이프니쯔(Leibniz)의 견해
하지만, 과학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논리적 결론은 고전 논리학의 구조적 결함이라고 생각하고, 참과 거짓으로만 구분하는 이가(二價) 논리학에서 벗어나, 미래 명제는 우연적(contingent) 발생이라는 제 3의 논리값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명제는 아무런 ‘전제 조건’없이 그 명제가 ‘필연’적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했다.)
미적분학 창시와 발전자로 유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쯔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이 질서정연하지 않은 것을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신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했다고 여기는 것들은 사실은 ‘필연’적으로 발생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라면 *신을 ‘대자연’으로 생각해보자 .)
두 위인의 시대가 다르기도 하지만, 과학자(자연의 우연 발생적)와 수학자(절대적인 질서를 따르는 우주)의 사고 방식의 차이라고도 느껴진다. 어째든,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우연과 필연에 대한 진실은 쉽게 결론이 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자유 의지 (Free Will)
단순하게 생각하면, 미래에 대한 결정은 당연히 본인이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내일 특정 시간에 내가 이 자리에 있을지 없을 지 자신이 행동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런 모든 결과는 이미 신이 결정해 놓았다고 믿는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을 ‘미신’을 믿는 지능이 낮은 사람들로 여기지만, 사실은, 단지 잠시의 행동을 어떻게 하든, 순간적인 우연의 합(合), 즉 운명은 자기가 행한 대로 가지 않는다. 마치 줄에 매달린 인형극의 인형이 공기의 흐름에 살짝 움직이는 듯 하지만, 결국은 위에서 줄을 조절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위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명상과 사고를 거친 철학자(논리학자)들의 결론은, ‘우연과 필연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대한 우주의 힘대로 움직이는 미래의 운명, 즉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행동은 ‘자의적(恣意的)’이고 미래에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자유 의지를 절대 누그러뜨리지 않는 것 또한 인간의 숙명이다. 신에게 항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대 자연의 힘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태생적 운명을 거부하고 자기의 길을 개척하려고 한다. 고대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인간들이 신에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인간들은 신에게 도전하기도 한다. 물론, 신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지만…
종파에 따라 약간씩 견해가 다르겠지만, 기독교의 ‘예정설’에 따르면 ‘…주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어, 어떤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인지, 사실은, 모든 것을 이미 결정하셨다. 아담과 이브이래 인간들이 이미 실패할 것을 알았지만, 잠시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것처럼…..’
글/사진 제공:송시혁 (송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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