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스포임에도 완벽한 엔딩으로 여운을 길게 남기는 <아킬레우스의 노래>
글/박효진(빅토리아 독서모임 회원)
‘그리스 로마 신화’ 하면 자동으로 머리 속에서 재생되는 god의 목소리. 자, 지금부터 우리와 함께, 멀리 떠나보자! 그리스 신화 전설 속 시간으로! 시간의 여행, 올림포스의 영웅의 시대! 90년대생 사람들은 나와 함께 지금 따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매일같이 빌려 보던 그리스로마 신화 만화책들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지던 올림포스의 신들. 그 세세한 신화의 내용은 기억이 가물하지만 그 때 그 즐거웠던 추억 덕분인지 ‘그리스 신화’ 하면 반가움이 먼저 든다.
이 책도 그랬다. 작년 한국에 ‘키르케’ 열풍을 몰고 왔던 작가 매들린 밀러의 또 다른 작품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고, 그리스 신화, 그 중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신화를 각색한 소설이라는 말에 반가움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킬레우스 하면 ‘아킬레스건’에 관련된 신화만 떠오르고 파트로클로스는 아예 기억에 존재하지도 않았음에 모두들 신화가 이 소설의 ‘스포’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그 스포가 흐릿했달까.
이 소설은 Achilles(아킬레우스)의 친한 동료이자, 연인이자, 동반자였다고 서술되는 Patroclus(파트로클로스)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전엔 한 나라의 왕자였던 그였지만, 어느 날 실수로 Clysonymus를 죽인 파트로클로스는 왕자라는 명예를 잃고 아버지에게 버려진 채 Peleus(펠레우스)가 통치하는 Phthia라는 나라로 오게 된다. 펠레우스는 좋은 인품으로 신들에게 사랑받는 인간이었는데, 바다 요정인 Thetis(테티스)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Achilles 아킬레우스다.
펠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 외에도 많은 소년들을 궁에 데리고 있으며 교육시키고 있었는데, 그 많은 소년들 중 단 한 명은 후에 아킬레우스의 Therapon 이 될 수 있었다. (Therapon이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서에서는 이렇게 묘사가 되어있다; A brother-in-arms sworn to a prince by blood oaths and love.) 소년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던 파트로클로스와 우연한 기회에 말을 트게 된 아킬레우스는 그를 저녁자리에서 Therapon이라 칭하며 그렇게 둘의 운명은 맞닿게 된다. 그 후 아킬레우스의 방에서 함께 지내게 되며 파트로클로스가 그를 짝사랑하게 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정말
짝사랑의 ‘정석’ 이라고 할 정도로 그 묘사가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어느 순간 누군가를 짝사랑하던 나의 마음을 소환시키기도 했다.
Pathia 를 떠나 Chiron에게서 훈련을 받던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는 어느새 절친한 친구사이를 넘어 애틋한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던 중, 그리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Menelaus)의 부인 헬레네(Helen)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에게 납치가 되고,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형인 아가멤논과 함께 오디세우스(Odysseus). 아킬레우스를 포함한 수많은 영웅들을 끌어모아 트로이로 향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군대의 수장 헥토르(Hector)가 죽은 후 전사할 것이라는 어머니 테티스에 의해 알게 된 예언 때문에 계속해서 헥토르를 죽이는 것을 피하게 되고, 그렇게 전쟁은 몇 년이 넘게 이어져버린다.
그 이후 이야기는 소설로 만나보길 바란다.
그리스 신화, 그 중에서도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베이스로 창작된 이 소설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들이 아닌,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주변인물, 파트로클로스를 화자로 설정하면서 영웅들의 이야기 뒤에 가려졌던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꺼내놓은 듯 했다.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뒤 헥토르를 죽이고 시신을 마차에 끌고 다니며 표출했던 큰 분노에 대한 이유로 그 둘의 사랑의 서사는 충분했다.
초반에 그 둘이 함께 커가는 내용이 늘어지기도 하고 너무 잔잔해서 약간 지루한가 싶을 때도 있었는데 이야기를 다 읽고 난 후, 그 잔잔한 이야기들이 이 둘의 마지막에 여운이 남도록 만드는 장치였음을 느꼈다. 소설 후반부를 읽으며 몰아치는 전쟁의 묘사들과 다가오는 그들의 마지막에, 잔잔하고 평화롭던 어렸던 그 시절의 풋풋한 그들이 자꾸 떠올랐던 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미 알고 있는 신화이기에 이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복선처럼 깔리는 파트로클로스의 말들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많았다. 헥토르만 죽이지 않으면 아킬레우스와 함께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라든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입고 전장에 나가기 전 아킬레우스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에서 말을 아끼며, 후에 돌아와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을거라 생각하는 부분이라든지. 그게 마지막 대화임을 아는 것은 독자들 뿐이니 가슴이 미어질 수 밖에…
파트로클로스가 죽고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읽어내려갔는데, 예상을 전혀 빗나간 엔딩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아킬레우스가 그저 누군가를 죽인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보다 리라를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왕들에게 넘어가 치욕을 당할 수 있었던 많은 여자들을 구해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며 테티스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그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파트로클로스와 함께, 나도 같이 그들의 서사를 함께 떠올리며 되짚을 수 있었다. 그 때 그랬었지, 맞아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추억들이 있었지, 하며. 책을 덮은 후에도 이 대화 때문이었는지 여운이 굉장히 길게 남아 아직까지도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그 둘을 보내주지 못했다.
설레는 로맨스에 새드엔딩을 한 스푼 추가한 이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국어로는 ‘아킬레우스의 노래’, 영어로는 ‘The Song of Achilles’ 가 타이틀인 이 책을 찾아보길 바란다.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고 로맨스를 좋아한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The memories come, and come. She listens, staring into the grain of the stone. We are all there, goddess and mortal and the boy who was b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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