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두렵지 않겠어?

어떻게 두렵지 않겠어?

글/이재랑(빅토리아 문학회원)

딸아이가 책 한권을 건넸다. ‘나도 언제든지 이 할아버지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라며 건넨 책의 제목은  ‘The 100-Year-Old Man Who Climbed Out the window and Disappeared’이다. 요양원에서 100세 생일을 맞이하는 아침, 모두가 자신의 생일파티 준비로 분주한 틈을 타, 신고 있던 슬리퍼와 가운 차림 그대로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자기 방 창문을 힘겹게 타고 넘어 요양원 밖으로 사라진 스웨덴 할아버지의 모험담이다.  요양원에서 금한 술을 좀 더 자유롭게 즐기고 싶은 것이 이 탈출의 동기다. 

아직 모험의 종착역에 닿기도 전인데, 결말에 대한 궁금증 보다 ‘나는 백 살에도 요양원 울타리를 저렇게 뛰쳐 나갈 동기가 있을까?’, ‘무엇이 되었든, 그 동기를 발현할 판단력과 용기가 그 때쯤에도 내 안에 살아 있을까? ‘두렵지는 않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기 바쁘다.

반 백의 나이, 쉰을 바라보게 되었다. 결혼, 결혼, 육아를 힘겹게 끌고 가야 했던 이십대 후반의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그 때 쯤이면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를 찾았겠지라는 막연한 상상이 만들어 놓은 그 모습을 나는 지금 마주 하고 있다. 상상의 ‘쉰’과 현실의 ‘쉰’, 이 두 간극에 끼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생각해 보면 겨우 쉰인데. 이제 겨우 반 왔을 뿐인데 말이다. 

쉬었다 가라고 ‘쉰’인가? 혼자 생각에 피식 웃어 본다. 생각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눌려 있다 불쑥 튀어 나온 엉뚱한 상상이 아닐까? 틀린 상상이 아니길 바라며 ‘쉰’의 어원을 찾아 보았다. 보기 좋게 추측이 빗나갔다.  ‘아리랑 역사와 한국어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임환영은 나이 ‘쉰’은 고대 이집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질녁의 어둠이 가득한 것’ 즉, ‘인생의 말년’을 의미한다고 추론한다. 이제 반을 달려 왔을 뿐이라 생각했는데 인생의 말년이라니.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해석이다. 그래서 여기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 하루 일을 마무리하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해질 무렵, 하루를 되돌아보며 잘 쉬었다가 다음 날을 준비하라는 뜻으로.‘잘 쉬었다가 인생 후반전을 잘 준비하라는 이정표같은 것이 아닐까?  이 정도면 꿈 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해도 될 듯 하다. 

늦깎이 공부로 시작된 늦은 이민 생활, 간절했던 재취업, 지금도 진행형인 진로에 대한 고민, 느리고 더디기만 했던 그러나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10년을 살아 내고 마주한 ‘쉰’ 앞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잠시 숨을 고른다. 지금 서 있는 이 곳은 어딘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반복되는 인생의 물음을 다시 던진다. 

같은 나이를 두 번 맞이하는 사람은 없다.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스무살도, 자신만의 울타리를 만들어 가고 있을 서른살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느라 치열한 마흔살도, 보드카에 대한 자율권이 그리워 요양원 창문을 넘으며 맞이한 알란 할아버지의 백 살도 모두 한 번이다. 힘겹게 쌓아올린 울타리를 다시 뛰어 넘어 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는 나의 쉰 살도 단 한 번이다.

‘그런데, 너, 두렵지 않니?’ 누군가 묻는다.

어떻게 두렵지 않겠어? 두려움과 함께 가는 거지. 두려움에 짓눌려 살 수는 없잖아. 두려움 주머니를 차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거야.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조금 더 앞선 시간 속 내가 더디지만 꾸준히 두려운 발걸음 하나씩 앞으로 내딛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어서 와,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수고했어.’ 라고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 주고 응원해 줄거라고 믿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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