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기록하다

하루를 기록하다

이달의 추천도서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저자:이옥남

추천인 : 박아람 (빅토리아 온라인 독서모임 ‘두 마리 토끼’ 임원)

천고마비의 계절이 빠르게 지나가고 단풍도 거의 다 져버린 어느덧 11월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들은 매일의 하루를 어떻게 마감하고 계시나요? 대개는 학업, 업무, 육아 및 살림 등으로 바쁘고 고단했던 하루를 가족과 수다를 떨며 끝내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불룩해진 배를 보고 희열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 수도 있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한 편 시청하며 마무리를 하기도 하죠. 이 달에 소개해드릴 책인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저자 이옥남 할머니는 강원도 양양 서면 송천리에서 농사를 하시면서 본 특별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일상을 공책에 또박 또박 꾹꾹 눌러 하루를 정리합니다. 

이옥남 할머니는 여자가 글 배우면 안되고 길쌈을 잘해야 한다는 아버지 아래에서 자라 일곱 살에 삼 삼는 법을 배우고 아홉 살 때 호미를 잡고, 우물 물을 너무 길러 이웃 사람들이 키가 안 큰다 라고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어찌나 배우고 싶으셨는지 오라버니가 방에 앉아 글 배우면 등 너머로 보고 외웠던 글자를 떠올려 아궁이 재를 긁어 모아 가, 나, 다… 를 쓰며 글을 깨우쳤고, 열 일곱에 살고 계시는 송천리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바람난 남편과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시던 시어머니께는 글을 안다는 것을 비밀로 해야 했고, 두 분이 세상을 뜨고 나서야 도라지와 더덕 등 산나물을 장에 내다 팔아 번 돈으로 공책을 한 권 사서 오로지 글자를 예쁘게 연습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1987년부터 본인의 일상에 대해 조금씩 기록하였습니다. 할머니의 일기를 보며 초등학교 교사인 손자 탁동철 분이 할머니의 지난 30년 세월과 삶의 애환을 2018년 책으로 엮어낸 덕분에 따스한 시와 같은 할머니의 글을 더 많은 사람의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담을 수 있게 되었죠.

이옥남 할머니 일기의 소재 중 가장 주를 이루는 것 중 하나는 ‘자연’입니다. 여느 농부들이 그렇듯 할머니는 비가 너무 와도, 너무 오지 않아도 자나깨나 심어 놓은 곡식 걱정 뿐이나 그러한 삶 속에서 희로애락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또한 겨울이 찾아오면 새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먹고 사는지 걱정되어 잠도 설친다고 하니 자연과 생물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정 많은 할머니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할머니의 글은 손자 탁동철 분이 책으로 펴내면서 띄어쓰기 등 조금 손보긴 했지만 맞춤법이 맞지 않은 것이 많고 사투리도 꽤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제 할머니가 모닥불 옆에 앉아 친근하게 직접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디다볼수록 신기하게만>

아래 콩밭을 맸다. 그 콩밭을 매면서 콩잎을 바라보면서

그리도 귀엽게 생각이 든다. 그렇게 동그렇게 생긴 콩이

어찌 그리도 고 속에서 동골라한 이파리가 납족하고

또 고 속에서 속잎이 뾰족하게 나오고 디다볼수록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니 뽑는 풀도 나한테는 고맙게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풀 아니면 내가 뭣을 벗을 삼고 이 햇볕에

나와 앉았겠나.

<뭣을 먹고 사는지>

소나무 가지에 뻐꾹새가 앉아서 운다. 쳐다봤더니

가만히 앉아서 우는 줄 알았더니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힘들게 운다. 일하는 것만 힘든 줄 알았더니 우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그렇게 힘들게 우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고

짐승이고 사는 것이 다 저렇게 힘이 드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힘들게 운다고 누가 먹을 양식이라도 주는 것도

아닌데 먹는 것은 뭣을 먹고 사는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힘들게 우느라고 고생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프다.

홀로 작은 농사를 하며 가꾼 나물을 할머니는 버스를 타고 장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팔기도 하지만, ‘자식들’에게 주기 위해 더 정성스럽게 기르기도 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그 애틋한 마음을 부모 본인이 아니고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적적한 시골 생활에서 자식이 잠깐이라도 찾아온다고 하면 반가움에 자식이 오기 전까지 하루 종일 아이처럼 신나 있고, 자식, 손주들과 손수 만든 두부, 나물 등 함께 밥을 먹는 것 자체로 큰 행복을 느끼십니다. 그러나 놀러 온 자식들이 이제 집으로 떠나고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쓸쓸히 외로운 마음으로 연락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그 걱정에 하루 종일 풀이 죽어 있기도 하시구요.

<조이 이삭부터 만져 보고>

비가 와서 그저 묵묵히 바깥만 바라보고 있으니

괜히 자식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언제나 늘 곁에 두고 싶은 맘 변하지 않는구나.

올 적에는 반갑다가 또 가고 나면 보고 싶지.

늘 눈에 솜솜할 뿐이다.

백수 (白壽)의 할머니의 삶도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쉬운 지출과 소비에 대해 한탄하기도 하고 구수한 욕으로 힘든 순간을 명랑하게 승화시키기도 하십니다.

<장>

오늘은 장에 가서 명태 다섯 마리에 오천 원 주고 사고

또 오징어 제친 거 오천 원 주고 과질 사천 원 주고

고구마 이천 원 주고. 망태 매서 팔은 값 만 원 찾아가지고

주전자 만 원 주고 사고 그럭저럭 가고 오는 차비까지

삼만 원 돈을 다 썼네.

벌기만 힘들지 쓰는 것은 정말 시간도 안 걸리네.

별로 산 것도 없이 돈 삼만 원을 그렇게 쉽게 썼네.

<왜 자꾸 뛰나가너>

올해도 산에 도토리가 많이 떨어졌다.

날마다 도토리 까는 게 일이다. 망치로 깨서 깐다.

안 깨면 못 깐다. 반들반들해서.

돌멩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데 자꾸 뛰나가서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

나만 보게 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 너무 어려운 단어나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를 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내가 느끼는 순수한 그 때의 느낌과 감정에만 집중하면 기록하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되죠. 그래도 어떤 말을 적을지 어떻게 써야할 지 고민된다면 초보자도 손쉽게 써볼 수 있는 김남영 저 ‘매일 세 줄 글쓰기’를 추천해드립니다. 일상에서 놓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사고하는 훈련을 기르고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방향을 제시해주는데 도움을 얻으실 수 있을거에요. 할머니의 글 (혹은 시)에서 보다시피 유별나 보이지 않는 소소한 일상을 ‘기록’해본다면 그 행위 자체로 그 하루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요. 일년이 지나, 혹은 십년이 지나 나의 짧은 일기를 펼쳐 그 때의 감정을 떠올리며 회상에 젖는 순간은 그 어떤 독서보다도 더 짜릿하고 놀라운 선물을 줄 것입니다. 그 미래의 나를 생각하며, 저는 오늘 하루를 기록하며 마무리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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