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철수”

내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새 옷을 갈아 입고 예배당에 가는 날인데 부모님이 안 보이고 집안 공기가 싸늘하다.
나의 아버지(김형태)는 일본 와세다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함흥에 있는 유명한 학교에서 수학교수로 일 하셨는데 하나님을 믿고 지식층이라 하여 그날 새벽 4시에 인민군 2명이 우리집에 들어와 우리 부모를 잠옷차림으로 납치해 함흥 형무소 쪽으로 끌고 간 후 소식이 끊겼다.
우리 어린 4형제는 이때부터 반동분자 가족으로 몰려 숨어 살다가 국군이 북진할 때 작은 아버지(김형차)[아버지 쌍둥이 동생]{일본 와세다 법대졸}가 UN군 장교로 우리집에 찾아와 형님가족을 살리겠다고 부대의 도움을 받아 우리 형제를 흥남부두에서 피난민 배를 태워서 거제도 피난민(포로) 수용소를 거쳐 부산에 와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됐다.
바람찬 흥남부두, 아비규환, 인간이 겪기 힘든 생지옥을 목격한 피난민 배 선장(레너드 라루)의 간증을 입수할수 있어서 해병대전우회 가족과 빅토리아 한인교민들이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감사 하겠습니다.
‘레너드 라루’ 1950년 당시 35세, 그는 처음으로 선장직에 올라 배를 하나 공급 받는다. 그 배의 이름은 ‘메러디스 빅토리아호’ 건저한 지 5년 된 7,600톤 급의 그 배는 선원 10여명과 함께 물자를 공급하는 화물선이었다. 선장이 된 후 그에게 내려진 첫 명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몰아 일본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요코하마 항에 정박한 후, 그는 연료를 가득 채운다.
“우리 배는 특명을 받고 있었는데, 12일의 항해 후 요코하마에 도착한 우리는 전투 장비를 실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곳을 모른 채 우리는 항구를 떠났습니다. 명령서는 도쿄만을 떠난 후 개봉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도쿄 앞바다를 떠나 밀봉이 된 명령서를 개봉 했지요.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목적지: 동해 한반도 흥남>
한국 전쟁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 채 그는 1950년 12월 19일에 흥남에 정박한다. 흥남부두에는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을 만큼 피난민이 몰려 있었다. 기온은 영하 20도, 살을 에는 듯한 강풍이 불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바람막이 하나 없이, 심지어 아이들을 업고, 안고 바람이 몰아치는 부두에 서 있었다. 어떤 이들은 허리까지 차는 차가운 물속까지 들어와 배에 태워 줄 것을 애원하고 있었다.
불과 10km도 안 되는 곳에서 중공군이 포격을 가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빅토리아호는 퇴각하는 미국 해군에 연료를 공급했으니 이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들을 그냥 버려두고 갈 수도 있었다. 이미 2차 대전을 겪고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전략상 후퇴하는 미군이 빠른 퇴각을 종용하였다. 중공군의 포는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 여기 있소’하고 불을 훤히 밝히고 사람들을 태우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게다가 바다는 기뢰밭이었다. 화물선의 승선 정원은 12명. ‘레너드 라루’ 선장은 그때 결심을 하고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을 태우시오. 타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1950년 12월 22일 저녁 9시경에 시작된 승선은 밤새도록 진행되어 다음날 동이 트고 다시 정오가 될 때 까지도 계속 되었다. 신기하게도 더 태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어디선가 공간이 생겨나는 것처럼…..8천 톤에 이르는 강철로 이루어진 배가 마치 고무처럼 늘어나는 것 같았다. 선장님으로 부터 드디어 배를 출발 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미국 군함이 계속 포를 쏘아 대면서 철수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려 주었고, 흥남부두에는 네이팜탄이 쏟아지고, 군인들도 사라지고, 곧 이어 아예 항구 자체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에 배는 공해상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불빛도, 무전도, 기뢰를 탐지 할 장비도 없고, 물도 없고, 식량도 없이 무모한 항해를…..
배가 공해상으로 빠져나와 겨우 숨을 돌렸을 때 ‘레너드 라루’ 선장에게 선원이 물었다. “선장님, 이 배에 몇 명이 승선했는지 아십니까?” 선장이 대답했다. “글쎄, 아까 세었을 때 1만4천 명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자 선원이 “아닙니다. 1만4천1명 입니다. 방금 한 아이가 태어 났습니다.”
나중에 마리너스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이 순간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산모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게. 우리가 가진 식량, 방 그리고 뜨거운 물을, 그런데 의사가 있나? 어쩌지? 우리에게는 분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선원이 대답했다. “선장님, 한국인들은 나이든 여자가 산부인과 의사보다 더 침착하게 아이를 받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십시요. 한국 여인의 가슴에서 우유보다 더 풍성한 젖이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지 마십시요. 지금 4명의 임산부가 아이를 낳기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해중에 새로운 5명의 생명이 태어났다. 배는 남쪽으로 사흘 간 항해했다. 거제도에 도착해 뚜껑을 열었을 때 그들은 모든것을 각오했다고 했다. ‘약탈,식인 혹은 아사와 동사, 전염병 혹은 살인…..’
그런데 놀랍게도 단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그건 기적이었다. 그들이 하선하는데 만 다시 이틀이 걸렸다. 한국인들은 그 힘겨운 상황에서도 약한 이들에게 먼저 하선을 양보하였다. ‘팔꿈치로 멸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들은 난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품위를 간직한 사람들이었다’고 그는 회고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하선한 후 ‘레너드 라루’ 선장은 그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것을 알았고,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 앉았다. 그리고 그 후 아무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말만 전해지고 있었다.
“저는 때때로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작은 배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많은 위험을 극복했는지를….
그해 크리스마스에 한국의 검은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메세지가 저에게 전해 옵니다”
나중에 ‘마리너스 라루’ 수사는 1956년 12월 25일에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하고,2001년 9월 14일에 생을 마칠 때 까지 47년을 “베네딕도 수도자’로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그 수도원이 뉴욕에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뉴톤’이라는 작은 타운에 있는 St.Paul’s 수도원이다.
왜 수도사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마리너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위대한 로맨스이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모험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수도원은 ‘봉쇄수도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외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리너스’는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글/사진 제공 : 김명정 (빅토리아 해병전우회)
올해 73세의 해병대 대위 출신 교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1학년 때 6.25사변이 터지면서 단란하던 가정에 엄청난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