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이렇게 세워졌다

빅토리아 이렇게 세워졌다

<기획: BC주-빅토리아 역사 알기 1> 빅토리아 역사

서부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빅토리아는 ‘정원의 도시’다. 인구 39만의 이 도시는 전국에서 15번째로 큰 도시로, 밴쿠버와 미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각 100km, 포트 앤젤리스에서는 40km가량 떨어져 있다.

전국에서 가장 기후가 온화하고 주변 풍광이 아름다운 이 도시는 분위기가 활기차면서도 치안상태가 좋아 Numbeo에 의해 해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톱20에 선정되고 있으며, 북미 도시 중 주민 만족도가 가장 높은 도사로 손꼽힌다. 또한 미국에서 발간되는 세계 유수의 여행전문지 Conde Nast지는 빅토리아를 매년 세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로 선정하고 있다.

다운타운 거리마다에는 영국의 전통과 식민지 풍의 잘 정돈된 건물들이 즐비하고, ‘정원 안에 도시가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꽃과 정원으로 가꾸어진 이 도시에는 연중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이 도시의 양대 랜드마크인 주 의사당과 엠프레스 호텔은 아름다운 이너하버와 함께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멋진 도시 분위기를 연출한다.

1700년 대 후반 유럽인 첫 상륙

빅토리아가 BC주의 수도가 된지 150년이 되는 해를 맞아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빅토리아의 초기 역사를 들여다 보자.

1700년 대 후반 유럽의 항해사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일대에는 송히스(Songhees) 등 코우스트 살리시족(Coast Salish People)들이 살고 있었다.

1778년 봄 영국의 James Cook 선장이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밴쿠버 아일랜드 서쪽 해안에 있는 Nootka Sound에 첫 발을 내 닫고 스페인 탐험대가 1790~1792년 사이 오늘 날의 에스콰이몰트 항에 잠시 입항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밴쿠버 아일랜드에 정착을 시작한 것은 그 후 상당기간이 지난 다음이다. 밴쿠버 아일랜드 최남단에 교역소 건설 임무를 부여 받은 헛슨 베이사의 총지배인 제임스 더글라스 선장은 1842년 오늘 날의 Sooke와 Beecher Bay, Mechosin, Esquimalt 그리고 빅토리아 하버 등지를 고루 탐사한다.

이듬해인 1843년 이른 봄 더글라스 선장은 로마 가톨릭 선교사 J. B. Z. Bolduc 신부와 함께 Clover Point에 교역소를 세우기로 최종 결정하고 3월13일 여기에 배를 정박시킨다. 다음 날인 14일 찰스 로스 선장 주도하에 그곳에 교역소가 설치되고, 당시 영국 여왕이자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구축한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 Fort Victoria라 명명된다. 빅토리아시는 이 날을 시의 공식 탄생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시가 마을로 정식 등록된(incorporated) 것은 1862년 8월2일이다.)

클로버 포인트

더글라스 선장은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적고 있다.

“인부 여섯 명은 우물을 파는 데, 다른 여섯은 통나무를 다듬는 데 배치했다. 오늘 Samose를 만나 여기에 건물을 짓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들은 이를 매우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말뚝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나는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말뚝 40개마다 담요 한 장씩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닷새가 지나자 건축 현장에 모인 원주민 수가 어느새 1,200여 명으로 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헛슨베이사의 모피상들이 하나 둘씩 태평양 연안으로 옮겨오면서 이들이 밴쿠버 아일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당시 섬 남부지방에는 Songhees 족과 Saanich족, Sooke족 등 세 개의 원주민 부족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었다.

1949년 왕실식민지 수도로 시작

그러나 밴쿠버 아일랜드에 법령에 의한 정부가 처음 들어선 것은 1849년 대영제국 정부가 이곳에 밴쿠버 아일랜드 왕실 식민지(Crown Colony of Vancouver Island)를 처음 세우면서다. 이듬 해인 1850년 3월11일 Richard Blanchard가 밴쿠버 아일랜드 식민지 초대 총독으로 취임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날 초대 총독의 취임식은 매우 추운 날씨 속에 17기의 대포에서 예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됐다. 모든 영국 출신 주민들과 Driver호 선원들이 행사에 참석, Richard Blanchard를 캐나다 서부 최초의 식민지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영국 왕실의 칙령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1854년 당시 빅토리아 인구는 남녀노소를 통틀어 23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858년 프레이저 캐년과 카리부 지역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와 멀리 호주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확천금을 노린 금광업자들이 대거 밀려들면서 빅토리아는 이들의 정박지이자 물자공급기지가 되면서 급팽창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캘리포니아를 출발, 그 해 4월25일 빅토리아항에 첫 입항한 Commodore호에서 담요로 몸을 두르고 총과 삽자루를 둘러맨 450명의 광부들이 떼지어 내리는 광경을 처음 본 주민들은 그 광경에 놀라 교회에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으며, 이를 시작으로 그 후 수주일 사이 빅토리아항에 입항한 광부 수가 무려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시기 한적한 바닷가 마을 빅토리아는 순식간에 북새통을 이루는 상업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지금의 James Bay 일대에는 수를 세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천막이 세워지고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로 땅투기가 극성을 부리면서 25달러에 거래되던 땅 한 필지가 일주일 사이 3,000달러로 껑충 뛰는 등 투기광풍이 일기도 했다.

19세기 서부 캐나다 최대의 도시

 

계속해서 프레이저 밸리와 내륙의 톰슨강에서 금을 채취하기 위해 몰려든 광부 수가 급증하자 영국 왕실은 같은 해(1858년) 11월 19일 Richard C. Moody로 하여금 현재의 Fort Langley에 서부 캐나다 두 번째인 ‘브리티시 컬럼비아 왕실식민지(Crown Colony of British Columbia)를 세우게 하는 한 편 다음 해인 1859년 2월14일 프레이저 강변의 New Westerminter를 이 식민지의 수도로 지정한다.

그러나 18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지난 수 년 동안 뜨겁게 달아 올랐던 골드러시 열풍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왕실 내에서는 밴쿠버 아일랜드와 메인랜드에 따로 세워진 두 개의 식민지가 제도적으로 고비용,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일기 시작했다. 결국 1866년 11월19일 대영제국 의회의 식민지 통합 칙령이 빅토리아와 뉴 웨스트민스터에서 동시에 발표되면서 두 개의 식민지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 때 빅토리아에서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뉴 웨스트민스터의 정부 청사 앞에서 J. A. R. 호머 수석보안관 주관으로 치러진 칙령 선포식에 참석한 사람 수가 몇 명에 불과하고 아무도 박수를 치거나 환호로 통합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두 식민지 통합 직후 한 동안 뉴 웨스트민스터에 있던 통합 식민지 수도가 1868년 빅토리아로 옮겨오고, 이어 1871년 7월20일 BC주가 캐나다 연방(Dominion of Canada)의 여섯 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빅토리아는 오늘까지 150년 동안 BC주의 수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세기 종반까지 빅토리아는 BC주의 가장 큰 도시이자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886년 캐나다 대륙 동서를 관통하는 대륙횡단 철도Canadian Pacific Railway가 완성되면서 그 서쪽 끝에 위치한 밴쿠버가 서해안 항구로 급성장하게 되고, BC주 제1의 도시 지위도 자연스럽게.밴쿠버로 넘어가게 된다.

행정-관광-IT-교육도시로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빅토리아는 행정도시, 인기 있는 은퇴지와 관광도시로 꾸준히 성장한다. 캐나다 서부 해군본부가 자리잡고 있고, 어선들이 모이는 항구이기도 하다. 조선업과 선박수리업, 목재산업이 활발하고, 최근에는 IT산업의 눈부신 발전이 빅토리아의 고용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빅토리아는 또한 빅토리아대학과 커모슨컬리지, 로얄로우즈대학, 레스터피어슨컬리지 등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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