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녹과 루트 비어의 ‘잘못된 만남’

에그녹과 루트 비어의 ‘잘못된 만남’

박상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터>, <연어 낚시 통신> 저자, 정원사, 빅토리아문학회 회원

“오늘은 내가 너희들 주려고 아주 특별한 것을 가져왔어.”

아침 9시에 갖는 첫 커피 타임. 사무실에 모인 동료들이 저마다 싸온 아침거리를 꺼내던 참이었다. ‘짠돌이’로 소문난 수퍼바이저의 난데없는 말에 다들 그를 쳐다봤다. 시선을 한 몸에 끌어 모으는데 성공한 그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다가가더니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이게 뭐야? 에그녹(Eggnog) 이잖아?”

실망한 듯한 알렉스의 말투에 그가 움찔했다. 테이블 위에 에그녹과 루트 비어(Root Beer)를 내려놓던 그의 머릿속에 뭔가 스치는 모양이었다.

“아! 맞다. 너는 채식주의자이지.”

그의 야심 찼던 계획이 첫 스텝부터 꼬였다. 챙겨온 종이컵을 내려놓던 그가 다시 암초에 부딪혔다.

“나는 못 마셔!”

유달리 입이 짧은 브래드가 연달아 일격을 가한 것이다. 소화 장애가 있어 글루텐이 들어간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고, 우유가 들어간 유제품에도 조심스러운 그였다. 종이컵 위에 에그녹을 따르던 데이브의 손이 멈칫했다. 우리를 쳐다보는 그의 두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그로기 상태에 빠진 그에게 카운터 펀치가 날아들었다. 뷰온이었다.

“아니, 다른 수퍼바이저들처럼 집에 초대해서 파티라도 좀 하시라니까 이게 뭐야? 연말이 다 됐는데, 이걸로 어물쩍 때우고 넘어가려고? 나도 안 먹어.”

큰 목소리에 주눅이 든 데이브가 아직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채 서있던 나와 베네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경이었는지 그의 표정이 애잔해 보였다. 베네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에그녹을 좋아하긴 하는 데, 루트 비어와 섞는 것은 처음 보는데? 그냥 맛만 보게 조금만 주면 안 될까?”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40줄의 베네사마저 이렇게 얘기하며 발을 빼고 있었다. 이제 데이브의 유일한 희망은 나 하나뿐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북미사람들이 연말연시에 즐겨 마신다는 에그녹이 아니던가? 루트 비어는 말이 비어지 발효가 되지 않아 음료수와 다름없다. 우유와 사이다를 섞어 마시는 것 비슷할 텐데 왜들 이리 야단법석이지? 설마 죽기야 하겠어? 심호흡을 한번 한 나는 결단을 내렸다.

“좋아! 나는 마실 게. 한잔 맛있게 말아줘.”

내 말이 끝나자 생기를 되찾은 데이브가 에그녹과 루트 비어를 반반씩 따라 찻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자기 꺼 한잔, 내 꺼 한잔, 그리고 바네사께 쪼금. 나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추스를 겸, 일부러 데이브에게 큰 소리로 ‘건배’를 외친 뒤 단숨에 들이켰다. 뭔가 느끼하고 물컹한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가다가 알싸한 끝 맛을 남겨놓았다. 난생 처음 보는 맛이었다.

한바탕 소란 속에 짧은 커피 타임이 끝나고 우리들은 사과나무들이 떨궈 놓은 낙엽을 함께 치웠다. 백 살도 넘은 이 아름드리 나무들 옆에는 성탄절 장식으로 ‘우유를 짜는 여덟 아낙’들이 젖소를 가운데 두고 서있었다.

그렇게 젖소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을 한 지 30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아랫배가 묵직해 졌다. 곧이어 싸~한 느낌이 도나 싶더니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잇따라 울렸다. 차가운 우유를 마신 뒤의 느낌과 비슷했다. 옆에서 일을 하던 데이브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걱정스레 묻는다.

“왜 그래? 괜찮아?”

“아니. 아무래도 이상해. 화장실에 가봐야겠어.”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화장실 신세를 져야했다. 손사래를 쳤던 동료들을 따랐어야 했는데,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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