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문학회 평론>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한상영 소설가/문학평론가 빅토리아문학회 회장

지난 해(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유명해진 작가가 있다.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다. 그가 1989년에 발표해 그 해 영국의 부커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품 ‘남아 있는 나날’은 영국의 한 저명한 저택의 주인인 달링턴 경의 집사로 평생을 보내고 지금은 이 저택을 사들인 미국인 페러데이의 집사로 일하던 중 새 주인의 호의로 떠난 스티븐스라는 사람의 6일 간의 여행기이다. 그러나 엄밀히 보자면 이 소설은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하는 기간 내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거의 90%이상이다. 해서 이 소설을 회상록 이라고 말해야 할 듯 싶은데 나로서는 이 소설을 회상록 이라고 정의 내리기에도 왠지 동의하기가 불편하다. 그러면 이 소설이 왜 나로 하여금 그러한 마음을 들도록 한 것인가?

20년 전에 총무로 같이 일했던 켄턴 부인이 보내온 편지에서 다시 일하고 싶은 뉴앙스가 있다고 생각한 스티븐스가 그녀의 의사를 직접 타진하고 데려올 목적으로 떠나는 여행 중에 그는 집요하도록 자신이 다른 저택의 집사들과는 구별되는 위대한 집사였다는 행적을 회상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이 소설은 내게 회상록의 형식을 빌려 위대한 집사라는 주인공의 맹목적인 주장을 펼친 한 편의 넋두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어쩌랴. 더구나 작가가 주인공을 통해 위대한 집사로 규정하는 몇 몇 행동을 보면 현대인의 의식 수준이나 오랜 역사를 관통하며 의롭게 지켜져 왔던 사회 규범에서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기에 더욱 실망스럽다. 자신의 부친이 2층에서 죽어가고 있지만 그것을 외면하고 저택에 초대 받아 와 있는 손님들 시중을 드는 것이 우선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지시와 책망으로 여차 없이 무시하는 엄격한 태도며 일 잘하는 유대인 고용인을 해고하라는 주인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는 총무의 반론도 묵살하고 가차없이 해고 통고할 수 있는 충성심이 투철해야만 위대한 집사라는 강변을 보면서 이사람은 인생의 한 자락 어느 지점에서 뭔가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전통있는 영국의 귀족이 소유했던 저택에서 스스로를 귀족의 신분과 동일시하는 자만감으로 일해 왔는데 전 후 돈 많은 미국인이 그 저택을 인수하면서 어쩐지 자신이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양도’ 되어 버린 초라한 신세로 추락한 것 같아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위대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자신이 스스로 위대하다고 우긴다고 위대해지는 것인가. 저명한 영국의 귀족을 모시며 일을 했다고 그 집 집사도 위대해 지는 것인가. 하물며 그 귀족이 1930년대 유럽의 상황에서 시국을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해 열열히 나치 히틀러를 지지한 사람일 진데 어찌 그 귀족으로 인해 그 집 집사도 위대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소설같지 않은 허무맹랑한 주장을 소설로 쓴 작가의 의도를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데 작가의 이름을 다시 보면서 언뜻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떠오르는 것이 있다.

일본. 일본인
이어서 나치 독일, 이유없이 해고 당하는 유대인, 돈 많은 미국인 새 주인. 일맥 상통하는 단어 들이다.
그리고 이어서 주인(주군)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위대한 집사, 사무라이 정신, 군국주의, 패전, 항복 조인식, 상처 받은 자존심
어쩐지 작가는 비장한 마음으로 배를 가르고 할복하는 사무라이의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국에는 유머를 좋아하는 새로운 주군에게 대한 맞춤 충성심으로 유머 기술?을 발전시키야 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는 모습을 보며 독자는 작가의 비뚤어진 위대함을 본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는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은 하나의 승리다. 인간의 삶을 눈 앞에 보듯 설득력 있게 풀어낸 이 초상에는 독창성, 유머와 부조리가 교차 되는 흥미진진함 그리고 궁극적으로 깊은 감동이 담겨 있다.

아마도 선데이 타임즈의 기자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이 기사를 쓴 것 같다. 이 소설 어디에서 승리를 볼 수 있는 가? 독창적일지는 모르지만 이 소설 어디에도 유머는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의 삶을 풀어낸 것이 아니라 주군을 위해선 인간을 도구화 해도 좋다는 오만이 내면에 숨어 있다. 흥미진진함 대신 오히려 항공모함 굴뚝으로 전투기를 몰고 돌진하는 섬찍한 공포가 느껴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실력자 미국인 주인에게 새로운 충성을 서약하는 비굴함이 담겨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전쟁동안 저질렀던 반 인륜적 행위들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울러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며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인의 오만함이 물씬 풍겨있는 이 소설이 어떻게 영국인들에게 어필했을 까하는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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