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년 만의 화해

<문학회 수필> 오십년 만의 화해

엘리샤 리 수필가, 화가/빅토리아문학회 회원

내 나이 오십 살 때 였으니까 십칠 년 전의 일이다.

미국에 살때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화실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내가 직장에서 쉴 수 있는 월요일 하루와 토요일 저녁은 무엇 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한 날이었다. 어느 토요일 저녁 늦게 혼자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내 이름이 들렸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를까? 아무리 둘러 보아도 화실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똑 같은 음성이 내 귀에 들려온다. 나는 너무 놀라서 붓을 손에서 내려놓고 정신을 차려보려고 애를 썼다.

잠시 후 내 머리를 감싸는 느낌이 들면서“너는 꼭 잘 될 것이다. 훌륭한 화가가 되거라. 네게 미안하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인가? 아버지는 내가 열 두 살때 돌아가셨지만 살아 생전에도 나와는 거의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는 분이다. 평소 단 한번도 다정하게 아버지를 불러보지 못했던 나는 혼자였지만 쑥스럽고 어리둥절 했다.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 날 밤 캔버스 앞에 앉아서 오십 년 동안 쌓여있던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씻어내면서 오랫동안 울었다.

유아시절 홀로 다락방에 엎드려 감당할 수 없는 고독 속에 묻혀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내 존재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고 부모에 대한 원망이었으며 삶에 대한 회의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죽음을 생각해 왔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녀의 슬픔을 몸소 체험해 왔다. 아버지는 예술성이 강한 분이셨다고 한다. 그의 손이 닿는곳은 늘 희한한 물건을 만들어냈고 평생에 미술가가 못되신 것이 한이었다고 어머님이 평소 말씀해 주셨다. 내가 일찍 그림을 배우지 못한 것을 불평하면 어머님은 “현재에 만족해라. 인간은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 고 격려 내지는 위로의 말씀을 하시곤 했다.

아버지의 기억은 전혀 없다. 일본에서 공부했고 해방후 한국에 와서 방직공장을 경영 하면서 잘 살다가 순간의 실수로 사업체를 다 날리고 인생을 포기 한 채 살다 가신 분이다.

나는 가끔씩 아버지가 우리와는 딴 세계에서 살아 오셨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아버지는 나보다 더 많은 슬픔과 회한의 세월을 살다 가셨는지도 모른다. 그날 바람이 되어 오셨던 아버지는 나의 눈물을 씻겨 주셨고 늦게 나마 아버지의 사랑도 알려주셨다. 연필 한 자루도 사주시지 않았던 아버지가 내 손목을 다정스럽게 잡으시면서 나와 화해 하시던 그 날 밤을 잊지 못 한다. 비록 수 많은 아픔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웃음과 나의 눈물이 또 아버지의 눈물과 나의 웃음이 캔버스를 누비고 있다. 그 속에 수 많은 색깔들이 녹아나고 실패와 발버둥이 있고 또 밤을 새우며 고뇌하는 한 인간의 아픔이 서려 있다.

“아버지, 내게 그림 그릴 수 있는 소질을 물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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