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그리고 소통

<초대 칼럼> 공감 그리고 소통

요즈음 ‘소통’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정치계를 비롯하여, 사회 각계각층에서 소통의 부재를 탓하는가 하면,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과거 권위주의시대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장(家長)인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가치관이 변하고, 사회가 다양화됨에 따라 일방통행식 소통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기에 이르렀다. 기업이나 단체, 조직에서는 상명하달(上命下達)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존중되고 수렴되어질 때, 창의력과 경쟁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간의 세대 차이는 많은 부문에 있어서 갈등과 오해의 요인이 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소통이 필요한 때다.

소통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한가? 상대방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공감이 세상을 바꾼다. 공감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 입장에서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다. 내 기준으로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 입장에서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공감능력은 얼마나 되는지, 대화의 예를 들어보자.
어린 아이가 넘어져서 아프다고 운다. 그때의 반응- “다친데 없지? 됐어! 별거 아니네. 울지 마라! 사내대장부가 그런 것 가지고 울다니!”
넘어진 아이를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야단을 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발상이다.
또 다른 사례ㅡ 어린 아이가 고기를 안 먹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그때의 반응-, 말도 안 되는 소리! 고기가 얼마나 맛있는데! 키 크려면 고기를 많이 먹어야 되는 거야! 어서 먹어라.”
먹는 것도 어른 기준으로 아이에게 강요를 하고 있다.

위 두 가지 사례에서 보면 나의 공감능력은 ‘매우부족’이다. 상대방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머리로 추리하고 논리화 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고 있고, 나를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으로 삼고 자기중심적으로 장벽을 치며 속박하고 있다. 어린아이와의 소통이 이럴진대 하물며 다른 소통은 어떻겠는가!

공감과 소통은 가족에서부터 시작된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간에 함께 살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나는 소통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형식적으로 들어주기는 하는데 상대방의 말에 공감하기 보다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평가하고 심판해 버리는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러이러하고 저것은 저러저러하여 잘못된 거야! 이치에 안 맞는 것이지.’ 이런 식이다. 이성적으로 맞는 말이겠지만 감성적으로는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인간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다. 바보는 바보의 입장에서 그 언행이 최선이요, 초등학생은 초등학생 입장에서, 대학생은 대학생 입장에서 스스로 100점이라고 여기고 있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10점도 안 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그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상대방을 10점으로 평가를 하였다면 상대방이 10점이 아니다. 나의 공감이해 능력이 10점인 것이다. 모자란 90점은 나의 반성거리다. 그래서 인도 속담에 “형제의 신발을 신고 석 달을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험담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어린 아이가 아프면 그냥 아픈 것이고, 고기가 싫으면 그냥 싫은 것이다. 그의 부적절한 행동은 ‘다른 선택 가능성’을 몰랐을 경우 비롯된다. 좋고 싫은 감정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훨씬 자유로워진다. 내가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한다하여 10점짜리가 갑자기 100점이 될 리 만무하다. 내가 상대방 눈높이에 맞추어 주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한 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 황희 정승은 소통의 달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여 종들이 서로 다투다가 ‘갑’이라는 종이 찾아와 하소연을 하자 “네 말이 옳다!”라고 하여 내 보내고, ‘을’이라는 종이 또 찾아와 하소연 하니 “네 말이 옳다!” 하여 내 보내고, 그것을 지켜본 조카가 숙부의 분명치 못함을 지적하자 “네 말도 옳다!” 하였다는 이야기다.

과연 황희정승은 줏대가 없는 사람이었을까? 역사가들은 그를 공명정대하고 원칙을 살리는 최고의 정승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모든 국사(國事)를 토론을 통해 논의하고 결정 하였다.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충분히 말하게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최종 합의를 이끌어냈다. 사람이 입이 하나고 귀가 둘인 것에는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훌륭한 지도자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고 황희정승처럼 남의 말을 많이 들어주는 사람이다.

소통의 또 다른 문제는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을 잘 구분 하는데 있다고 본다. 세상에는 겉으로 나타나는 사실과 그 내면의 진실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이 하는 말도 겉으로 표현하는 말과 그 속마음이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푸에르토리코 국립미술관에 있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 이야기를 상기해 본다. 늙은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 행각같이 표현 되어, 처음 보는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 한다. 그러나 이 그림 뒤에는 감동적인 진실이 숨겨져 있다.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투옥된 아버지, ‘음식물 투입금지’라는 잔인한 형벌로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그 아버지를 위하여, 해산한 지 며칠 안 된 딸이 면회를 가서 그녀의 젖가슴을 풀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리는 숭고한 사랑을 그린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이와 같이 우리 주변에는 겉으로 나타나는 사실과 그 뒤에 숨은 진실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진정으로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완전한 경청을 하려면 상대방의 말을 깎아내리거나 부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심판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훈계해서는 더욱 안 되는 것이다. “아!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것이 올바른 경청의 대화법이다. 상대방의 말에 끼어들지도 질문하지도 말고, 조언하거나 충고하지도 말아야 한다. 굳이 의견을 말하려면 상대방의 말을 완벽하게 재정리한 후에 나의 의견을 제시하라고 조언한다. 이렇게 하여 공감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기쁘고, 더불어 나도 기쁘고, 모두가 즐거워진다. 공감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며 화목동락(和睦同樂)의 첫걸음이다.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려면 먼저 나를 비워야 한다. 물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 물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물 자체의 속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물과 같은 마음으로 상대방의 말을 사실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이자. 부정적인 것은 내 안에 취부하지 말고 자성반성으로 놓아버리고, 심판은 대자연법(大自然法)에 맡겨 버리자.

성훈에 ‘화목하는 마음으로 보고 듣는 것이 서로가 사는 도리이다’ [和心之見聽 相生之道理] 라고 밝혀 주셨다 상대방을 평가하고 심판하지 말고 상대방 입장에서 보고 듣는 훈련을 해야 되겠다. 사물의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보고 듣지 말고, 그 내면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운으로 보고, 기운으로 들으라’ [氣也之見 氣也之聽]는 말씀을 명심하여 실천 해야겠다.

고인수
<전 삼성인력개발원 부원장, 삼성전자 부사장, 저서: 삼성신경영 전도사, 행복 찾기 멘토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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