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境界人, A Marginal Man)

<송선생 교육칼럼 39> 경계인(境界人, A Marginal Man)

이번 칼럼에서는, 필자가 캐나다에서 두 자녀를 키우면서 느끼고 겪은 문제를 쓰고자 한다. 이 칼럼은 이민과 조기 유학온 우리 자녀들의 사회적 심리적 문제에 대한 서두일 뿐이다.

누가 경계인인가?

빅토리아에 사는 우리 한인들은 모두가 경계인(marginal men)이다. 이민 온지 30년이 넘었건, 이제 막 유학을 왔건, 한인 문화와 캐나다 문화사이에 서 있는 우리는, 경계인이다. 사회심리학(social psychology)상의 용어로 ‘사회 문화양식-특히 언어나, 이념, 가치기준을 달리하는 두개의 집단에 동시에 귀속되는 사람을 <경계인>’이라고 한다. 경계인은 어떤 문화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버릴 수 없으면서, 또 다른 문화에도 완벽히 적응한 것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이민이나 유학을 오면, 자녀들이 부모들보다 훨씬 더 영어를 빨리 배우고, 캐나다 문화에도 빨리 적응하는 것을 보면서 흐믓해 한다. 반면에 부모들은 도데체 영어가 느는 것 같지도 않고, 캐나다 시민권자가 된 후에도, 문화적으로는 한인의 틀에서 거의 벗어 나기 힘들다. 다만, 국제공항 입국장(immigration)에서만 분명하게 ‘I am Canadian.’이라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한국로부터 캐나다에 입국할 때, 캐네디언 여권을 소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입국 심사관은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다른 캐네디언에게 물어보지 않는 질문을 한다. “Have you brought Soju?”

한인 부모들은 우리 자녀들도 영원한 ‘경계인’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그들의 영어 발음이 네이티브와 거의 비슷해 지더라도, 그들이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들 자신이 “나는 한국사람이 아니고, 캐네디언이에요!”라고 외쳐도 그들은 분명한 ‘경계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들이 ‘한인’이기 때문이다.

초반의 어려움과 적응

필자는 13년전에 한국을 떠난 두 딸이 있다. 첫 째는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둘 째는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에 참석한지 3일이 지나서, 그들이 그리워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한국을 떠났다.

첫 째는 한국에서 이미 영어를 조금 배우긴 했지만, 친구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종종 오해하기도 했다. 둘 째는 더욱 심각했다. 외국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지라, 학교에서 한국말이 통하는지 알고 처음 학교에 갔다가, 영어만 쓰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역시 애들은 영어 습득능력이 빨랐다. 1~2년이 지나자 영어가 서툰 이민자 자녀들을 도와주게 되고, 금새 한국말 발음도 버터를 바른 것처럼 굴러가고, 캐나다 많은 친구들과 사귀면서, 캐나다 생활에 쉽게 젖어 들었다.

어린 경계인의 정체성

하지만, 우리 애들이 영어와 문화에 익숙해 지면서, 경계인으로서 사건들을 겪기 시작했다. 원래 약간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둘 째가, 4학년에 들어가자마자, 짧은 시간내에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본인의 어려웠던 초창기 이민시절(?)을 경험삼아,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서툰, 막 이민 온 독일 친구를 늘 도와주었다.

어느 날, 캐네디언 친구로 부터 독일에서 이민 온 친구와 함께 생일 초대를 받았다. 영어가 서툰 독일 친구를, 여러 친구들에게 서로 소개시켜 주고 도와주면서 파티가 더욱 즐거웠다. 파티가 끝날 무렵에 생일 초대한 친구의 어머니가 초대한 모든 친구들을 한자리에 불러서 파티에 와서 즐겨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했다. 특별히, 내 딸에게 참석해 준 것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흔하게 물어보는 질문을 했다. “Where are you from?” 국제적(?)인 친구까지 와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분위기라고나 할까….

집에 돌아와서 아무말 없이 오랫동안 창문을 바라보고 서있는 딸에게 필자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대답 대신에 아빠게 부탁했다. “나는 한국에 가서 살래, 아빠.” “음….왜?”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필자는 딸에게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직감이 들어서, 오늘 생일 파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이민자로 이루어진 캐나다 역사와 법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내 딸의 판단은 달랐다. “영어를 잘 못하는 독일 친구한테는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지 않고, 내게만 물어봤어.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까 나는 친구들과 다르게 생긴 ‘Asian’이 쟎아. 캐네디언 TV에서 Asian이 주인공인 드라마는 거의 없지. 있어도 Asian은 funny하거나 ridiculous한 사람으로만 나오고…”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빠는 여기서 살어. 하지만, 나는 아빠가 비행기표만 사주면, 혼자라도 한국에 갈 수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한국에서 살래.”

십년이 지나고 우리 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우리 가족 모두 뉴욕 여행을 했다. “너 대학졸업하고 뉴욕에서 계속 있고 싶냐? 아니면, 서울에 가서 일하는 것은 어떠?” “내가 왜? 나는 캐네디언이에요. 빅토리아도 좋지만, 아마도 나는 토론토에서 살거예요. 한국이나 뉴욕보다는 캐나다에서 사는 것이 제일 편하고…”

하지만, 필자는 우리 애들이 영원한 ‘경계인’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부모인 내가 ‘한인’ 이기 때문이다. 인종적인 차별이 있어서가 아니라, 언어적인 장벽이 아니라, 경계인으로서의 그들의 문화가 이미 태생적이기 때문이다.

경계인의 학창시절

필자의 첫 째 아이는 Waterloo 대학에서 공부한다. 워털루 대학은 캐나다의 MIT라고 할 정도 정도로 공대가 유명하지만, 더 특별한 것은 사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학 학부가 있다는 것이다. 큰 애는 수학 학부에 속한 ‘Math/Chartered Accounting” 학과에 입학했다. Math/CA는 매년 50명 정도만 선발하는데 워낙 인기가 좋아서 지원자의 6%정도만 합격한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그 학과에 입학해보니, 10%만 백인계 캐네디언이고 나머지는 중국, 인도, 한국 등 아시아계 학생들로만 꽉 찼다고 한다. Asian 학생들의 학구열과 경쟁이 좀 심하긴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애는 자기네 학과 친구들이 너무 편안하고 좋다는 것이다.

사실, 첫 째 애가 중학교 8학년 때는 완전히 캐네디언이 되는 줄 알았다. 사고방식도 캐네디언이고, 공부안하고, 노는 것도 캐네디언이었다. 특히, 똘똘 뭉친 캐네디언 7공주 그룹은, 우리애를 제외하면, 완전히 독립적이고 어른 말 안듣는 전형적인 10대 백인 여자 애들이다. (그래도, 캐네디언 애들 중에서는 공부도 잘 하고, 필자가 만나본 그들 부모들은 꽤 교육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학교에서는 일 분도 떨어져 지내지 않으려 하고, 방과후에도 해변이다, 다운타운이다, 공사다망 했다. 하지만, 필자가 운영하는 학원에는 절대 빠질 수 없었기에, 캐네디언 친구들이 그런 우리 애를 불쌍히 여겼고, 우리 애도 자기만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결국, 8학년이 끝날 때 즈음, 보다 못한 필자에게 엄청나게 혼을 나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8학년이 끝나고,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Summer 학기다, 학원이다 하루종일 뺑뺑이를 돌리면서, 우리 애는 여름 내내 열심히 놀 계획인 그 친구들을 따라 다닐 여유가 없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그 친구들과 지나치게 친할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렇지가 않았다. 그 친구들도 대부분 Mt. Douglas High School에 입학했는데, 별로 친하게 지내는 것 같지 않았다. 9학년이 끝날 무렵 딸에게 물어보았더니, 딸의 대답에 약간에 약간 놀랐다. “걔들은 완전히 변했어요. 솔직히, 요즘은 그 애들하고 공통 관심사도 별로 없고 걔들이랑 같이 얘기 하는 것이 좀 부담스러울 때가 많아요. 게들은 입만 열면, 남자 애들 얘기뿐이니…..”

여전히, 캐네디언 친구들과 학교 프로젝트를 하거나 약간 공적인 일을 할 때는 상당히 친해 보였지만, 한국 팝송을 같이 들을 수 있고 대학에 대해서 서로 얘기 할 수 있는, 한인 친구들과 더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서는 마음에 맞는 한인 친구들은 물론, 중국인 친구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경쟁도 하지만, 그 보다, 서로 도와주고, 어려울 때 조심스럽게 위로해 주는 친구들이 많아서 더욱 좋아 했다.

그런데, 우리 애를 비롯해서, 이민자인 우리 애 친구들도, 사회를 접하면서 ‘경계인’인 것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코업 잡 (co-op job)을 잡기 시작하면서, 사회는, 공부만이 아니라, 네크워크가 필요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점점 어려워 지는 전공 공부에도 불구하고, 50군데 이상, 레쥬메와 커버레터를 보내고 10번 이상의 인터뷰를 통해서 겨우 잡은 꽤 규모있는 회사에 들어가 보니, 이런 복잡한 절차도 없이 쉽게 co-op job을 얻은 친구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네크워크였다. 보스들의 친척, 중견 직원들의 소개, 큰 고객들의 자녀 등등… 대부분 로컬 백인들이었다.

물론, 그들 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짧은 코업 기간 동안 인정도 받았다. 본인이 경계인임을 인정하고, 본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학교를 떠나 사회 생활을 하면서, 성공의 야심을 가질 수록, 이런 도전은 계속 될 것이다. 또, 이렇게 도전해야 하는 상황에 있는 많은 경계인들이 어느새 중심에 서게 되기도 한다.

미국의 소설가 필립 로스의 작품에 대한 연구, ‘중심에 선 경계인’ 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유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과 배제 속에서 삶을 영위하면서, 결국 중심에 선 경계인이 되어갔다. 모순적인 현실 속에서도 자아를 확립하고 재현해 온, 미국에서 성공한 유대인들이 갖는 문화적 정체성을 우리 한인들도 스스로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글: 송시혁 (송학원 원장)

빅토리아투데이 2012년 7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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