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합격도 운명(運命, Destiny)이다

<송선생 교육칼럼 30> 대학 합격도 운명(運命, Destiny)이다

“아빠, 어차피 모든 것이 하나님 뜻으로 정해지는 것이니,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되지 않는다면, 노력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남 보다 노력이 부족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는 항상 열정적인 큰 아이의 마음이, 수 많은 실패로 많이 지친 모양이다. 최근에, 약 40개의 회사에 Co-op job을 지원한 후, 그 중 9개 회사에서 interview를 했지만, 결국 자기가 가고 싶은 Big 4다, Big 6다하는 내노라는 회사에서는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나마, 4개 회사의 차점자 명단에서 대기 중인 자신의 신세 타령을 했다.

“아빠는 하나님의 뜻을 믿는다. 그래서, 지금의 실패가 더 큰 성공을 하기 위한 연단(鍊鍛, 또는 鍛鍊, training)이라는 것도 확신하지………” 필자가 딸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내 생각을 설명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짧은 대답으로는 부족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내 딸아이와 비슷한 질문을 하는 학생들에게 필자의 생각을 말해 주고 싶다.

운명의 사전적 의미

‘운명’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의 삶과 죽음(즉, 命)이, 정해져 있는 힘에 의해서 진행된다(運)’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숙명(宿命)’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은 죽을 운명이고, (All men are destined to die.)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이 아닌, 미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Humans are all mortal.)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운명은 하나님의 뜻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딸아이의 말대로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왜 노력해야 한다는 말인가?

좀 더 ‘운명’에 대해서,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실험 등에서 같은 방법을 행하면 항상 같은 결과가 나온다. 이 일을 통해 “원인이 같으면 항상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운명론”이라고 한다. 약간 미흡하지만, 나름대로 필자가 믿는 ‘운명’의 의미와 흡사한 것 같다.

필자가 생각하는 운명론

필자는 기독교인이지만, 필자의 생각이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고, 그저 개인의 생각(믿음)이라고 간주해 주었으면 한다.

필자는, 운명(즉, 하나님의 뜻)이란 합리적이고, 공평해서 완전히 신뢰하지만, 신의 뜻, 또는 우주의 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 한다.

그런데, ‘운명을 믿는다’라는 것을 사람들은 ‘요행 (僥倖, luck by chance, fluke)을 바라는 것쯤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합리적 필연성’은 ‘우연의 일치’와는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서, 필자로서는 노력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인간 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원리는 불합리해 보일 때가 많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

일부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 중에도 ‘운명론’을 무조건 ‘요행’이나 믿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야 말로 과학이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과신(過信, overconfidence)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부분에 가서는, irony 하게도, 우연히 발생한 ‘요행’으로 결론을 내기도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우연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솔직하게, ‘아직은, 아니, 어쩌면 영원히, 인간이 깨닫지 못할 부분’을 과학에서 인정하고 설정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수학에서는 이런 부분을 공리(公理, axiom)와 공준(公準, postulate)이라고 한다.)

과학보다 더 논리적인 사고 방식, 숙명론

필자는 초등학교 때, 백과사전에서 고대인들이 생각한 우주를 그린 그림을 본적이 있다. 천구(天球,the celestial sphere, 또는 dome)에는 별들이 끈에 매달려 있고, 거대한 거북이가 물에 떠 있는 것이다. 오래된 세월을 살아 온 거북이의 둥그런 등짝에는 이끼처럼 군데 군데 숲이 우거지고, 울퉁불퉁한 등짝은 산과 산맥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때 생각해보면, 고대인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을까 비웃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현대의 과학에서 생각하는 세계관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현대의 세계관도 미래 사람들에게는 고대의 것보다도 세련되지 못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에 떠있는 거북이 등판은 외핵과 맨틀위에 떠서 움직이는 지각이나 대륙판을 말하는 것 같고, 끈에 매달린 별들은 우주의 중력장에 붙어 있는 별들 같기도 하고….

숙명론과 물리학은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무에 열린 사과가 땅을 향해서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뉴턴(Newton)은 ‘중력의 법칙’, 즉 자연의 ‘숙명적인 힘(신의 의지)을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다른 사람들은 평소에 경험을 하면서도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을, 뉴턴은 사과가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세상을 지배하는 ‘힘’ 때문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뉴턴이 힘과 운동의 원리를 완벽히 이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갈릴레오(Galileo)의 상대적인 시공간 운동과 뉴턴의 중력에 대한 치밀한 아이디어들도, 시간이 흐르고 연구를 할 수록 불완전하고, 많은 오류가 발견되었다. 결국 아인쉬타인(Einstein)의 상대성 이론에 이르러서, ‘빛 속도는 어떠한 상대적인 운동 상태에서도 일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질량과 시간의 수축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설명으로 우주의 법칙을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심지어,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단지 계란 후라이 요리가 완성될 수 있을 정도의 짧은 시간 내에, 생성되었다는 ‘빅뱅(Big Bang) 설(說)’까지 시도하면서, 이제 모든 우주의 모든 법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과신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적 지식으로 밝힐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우주 창조관’의 모습을 미래의 사람들이 바라 볼 때는, 거북이 등판보다도 더 우스꽝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떤 과학자들은 밝힐 수 없는 최초의 생명과 지구의 존재를 확률적 ‘요행’으로 넘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별(태양)과 행성(지구)사이 거리의 통계적 확률로, ‘우연’한 발생설로 설명하지만, 통계적 확률은 결과를 정리할 뿐이지,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아니며, 이런 태도는 비논리적, 비합리(非合理)적이고, 또한 정의에 대한 믿음 즉, 가치관이 없는 미신론(迷信論)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진정, 운명을 믿는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왜 우리 학생들은 노력해야 할까?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운명은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조건에서 같은 실험을 반복한다면, 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고, 좋은 대학에 겨우 간다고 해도, 졸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떨 땐,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같은 조건에서 같은 행위를 하게 되면,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기 쉬운 조건으로 붙기 힘든 대학에 지원한다면, 불합격이라는 결과는 숙명, 천명(天命) 즉, 신의 뜻이다. 지금, 운이 좋지 않아 실패한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환경을 바꾸던지 나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항상 동일한 결과를 가져 올 뿐이다. 하지만,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더 노력해서 변화하고 도전하면 된다.

그런데, 도전을 멈추는 것은, 하늘에서 그저 원하는 것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운명(신의 뜻)을 원망하는 것은 오히려 세상은 비합리적이며, 신은 편파적이고 세상의 정의에 대해 무능력한 존재이므로, 내 마음대로 잡신(雜神)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미신(迷信)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과 같다. (당연히, 필자도 이런 일들을 반복한다.) 반면에, 합리적이고 정당한 운명을 믿는다면, 새로운 도전을 계속 시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실패가 더 큰 성공으로 이끌게 되는 것은 ‘숙명’이기 때문이다.

기도(祈禱, pray), 기원(冀願, wish)

합리적인 신의 의지가 이미 확고 부동한데, 기도가 의미가 있을까? 옛말에 ‘진인사(盡人事)하고, 대천명(待天命)하라는 말’이 있다.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나서는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우선, 우리가 합리적인 운명의 방향과 결과를 이해하고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어떤 미래의 결과가 나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또 다른 운명의 모습이다. 하지만, 미지(未知)의 분야라고 해서, 앞으로 가기를 두려워 할 수만은 없다. 운명이 준 risk라면, 그것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고, 기원하는 것’이다.

기원이라는 것은 첫 째, 운명이 어디로 가는지를 경험적 지식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에, 직관(直觀, intuition)적으로 파악하고 답을 구하는 방법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명상(meditation)’이라고도 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라고 하며, 그것은 신의 말씀이 무엇인지 듣기 위한 것이다.

한편,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는 일방적으로 신에게 요구만 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듣는 것만도 아니다. 기도는 신과의 대화이다. 즉, 기도를 통해서 천명을 듣기도 하지만, 신은 내 기도를 듣고 응답하고,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어차피 운명은 천명, 즉 신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명 즉, 풍운(風雲)에 몸을 맡긴다는 말은, 현재의 어려움에 굴복하거나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후회 없이, 오로지 열정으로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 후에 기도는 필요하다. 필자는 이렇게 세상을 살고 싶다.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

매년,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볼 때마다, 항상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한번 더 이들에게 대입 지원의 기회를 준다면,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시도할 것이다. 필자도 두 번째 애가 대학을 지원할 때는 훨씬 더 합리적인 선택을 했던 것 같다. 합격이란 운명을 바란다면, 합리적인 선택이 우선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만으로는 합격을 보장할 수 없다. 거기에는 여전히 우리가 알 수 없는 운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학에 지원하기 전에도, 지원한 후에도, 기도는 필요하다. 심지어, 결과가 나온 후에도 기도는 더욱 절실하다. 성공에 대한 자만도, 실패에 대한 좌절도 있을 수 없다. 단지 신이 정해 놓은 과정을 갈 뿐이기 때문이다.

글: 송시혁 원장 (송학원)

빅토리아투데이 2011년 10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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